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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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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18세기 후반 서학을 통해 유입되었으며, 1784년 이승훈의 베이징 방문과 세례를 계기로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되었다. 이후 유교적 가치관과의 충돌로 신해박해,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 등 여러 차례 박해를 겪었지만,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을 통해 신앙의 자유를 얻고 1899년 교민조약으로 법적 보장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에는 항일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16개 교구와 3개의 관구, 그리고 북한 지역의 교구와 자치수도원구로 구성되어 있다. 2023년 기준 대한민국 천주교 신자 수는 약 597만 명으로, 아시아에서 가톨릭교가 강세인 국가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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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
가톨릭교회 정보
일반 정보
한국의 로마 가톨릭 교구
한국의 로마 가톨릭 교구
국가대한민국
설립1784년
신자 수5,923,332명(2017년)
인구 대비11.2%
교구 수16개 교구
대교구 수3개 관구
주교 수27명
교구 신부 수1,732명
수도회 신부 수547명
전체 신부 수2,279명
수사 수654명
수녀 수5,442명
고유 언어한국어
통계 (2017년 기준)
신자 수5,923,332명
교구 수16개
주교 수27명
신부 수2,279명 (교구: 1,732명, 수도회: 547명)
수사 수654명
수녀 수5,442명
관구
서울 관구천주교 서울대교구
천주교 춘천교구
천주교 대전교구
천주교 함흥대목구
천주교 평양대목구
대구 관구천주교 대구대교구
천주교 부산교구
천주교 마산교구
천주교 안동교구
광주 관구천주교 광주대교구
천주교 제주교구
천주교 전주교구

2. 역사

18세기 후반, 소수의 한국 지식인과 학자들이 서양 서적과 중국어 번역을 통해 가톨릭에 접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일부 학자들이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여 한국에 가톨릭을 세우기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1784년 한국 외교관 이승훈이 베이징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 그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가톨릭을 접하고 세례를 받아 베드로라는 이름을 받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가톨릭 서적과 종교 자료를 가지고 와서 친구와 동료들에게 나누었다. 이것이 작지만 중요한 한국 가톨릭 공동체의 시작을 알렸다.

한국 가톨릭교회가 한국에 처음 전래된 이후 수십 년 동안, 가톨릭 교회는 조선 왕조 치하에서 심한 박해를 받았다. 이는 가톨릭의 가르침이 당시의 유교 기반의 사회 및 정치 질서에 위협이 된다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앙은 현세의 권위보다 하느님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기에, 기존의 위계질서를 뒤흔들 잠재력이 있는 전복적인 사상으로 간주되었다.

1801년 프랑스 출신 가톨릭 사제 시메옹-프랑수아 베르뇌가 체포되어 추방된 것을 시작으로, 수년에 걸쳐 개종자 수는 증가했고, 박해의 강도도 심해졌다. 정부는 가톨릭을 금지하는 여러 칙령을 발표했으며, 알려진 신자들에게 고문과 사형을 가했다.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공동체는 은밀하게 성장했고, 이 기간 동안 많은 한국인 가톨릭 신자들이 신앙을 위해 순교했다.

1866년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 확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외국 세력의 개입에 대한 우려가 이 박해를 촉발했는데, 천주교가 서방 국가, 특히 프랑스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만연했던 반외세 정서는 천주교에 대한 적대감을 더욱 부추겼고, 그들을 박해의 손쉬운 표적으로 만들었다.

병인박해는 광범위한 폭력과 천주교 공동체에 대한 잔혹한 탄압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기간 동안 수천 명의 한국 천주교 신자들이 살해되었는데, 여기에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모두 포함되었다. 박해 속에서 순교한 주목할 만한 인물로는 프랑스인 시메옹-프랑수아 베르뇌 주교와 한국인 평신도 지도자 윤지충 바오로가 있었다.

이 시기 천주교회가 직면한 엄청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박해는 한국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을 꺾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의 결의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으며, 순교자들의 희생은 미래 세대 신자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2. 1. 천주교 전래와 초기 박해

18세기 후반, 정두원명나라에서 가져온 마테오 리치천주실의는 조선 사람들이 천주교를 스스로 받아들이는 데 영향을 주었다. 당시에는 천주교를 '서학(西學)'이라 부르면서 하나의 학문으로 취급했다. 정조는 천주교를 묵인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이 시기에 경기도광주 천진암에서 권철신의 제자인 이벽,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권일신 등을 중심으로 천주교 서적 강학회가 열리면서 본격적으로 종교로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이벽은 《천주공경가》를, 정약전은 《십계명가》를 짓는 등 천주교 교리를 체화하는 활동을 했다.

1783년 이벽은 북경에 갈 기회가 생긴 이승훈에게 천주교 신앙 상징물과 서적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1784년 이승훈은 북경 북천주당에서 그라몽(Jean de Grammont, 梁棟材)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조선에 돌아와 십자고상, 교리서, 묵주 등의 성물과 천주교회 문서를 가져왔다.[10] 그는 이벽, 정약전, 정약용 등에게 대세(代洗)를 하였다.

하지만 조선 가톨릭 교회조선 왕조 치하에서 심한 박해를 받았다. 이는 가톨릭의 가르침이 당시의 유교 기반 사회 및 정치 질서에 위협이 된다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앙은 현세의 권위보다 하느님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기에, 기존의 위계질서를 뒤흔들 잠재력이 있는 전복적인 사상으로 간주되었다.

2. 1. 1. 천주교 전래

한반도천주교가 최초로 뿌리내린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임진왜란(1592~1598) 때 일본군을 따라온 예수회 선교사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Gregorio Céspedes)가 전파했다는[8] 설에서부터,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었던 소현세자1645년 청나라에서 돌아오면서 독일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 신부에게 가톨릭 서적과 지구의 등을 선물로 받아 가져와 전래했다는 설까지 거의 100년에 가까운 차이를 보이는 추측이 존재한다.

가장 연대가 명확한 천주교 전래에 관한 기사는 1631년 정두원명나라에서 서양의 문물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가져왔다는 내용이다.[9]

18세기에는 사대부의 서가에 《도덕경》, 불경과 함께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가 꽂혀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종교로서 받아들여지기 전에는 '서학(西學)'이라 부르면서 하나의 학문으로 취급했다.

2. 1. 2. 명례방 사건 (1785)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 중에는 서울 명례방(明禮坊)에 사는 중인(中人) 역관 김범우도 있었다. 그는 1784년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때부터 정약용 형제, 이벽, 이승훈, 권일신 등이 김범우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모여 미사를 집전하고 교리 공부 등을 했다. 그러다 1785년 천주교 교리 공부를 하던 중 주위의 고발로 포졸이 들어와 그들을 잡아들였다. 이로써 천주교의 종교 활동이 처음으로 조선 조정에 노출되었는데, 이를 서울 명례방(明禮坊)에서의 집회 사건 또는 을사 추조 적발 사건 (乙巳秋曹摘發事件)이라고 한다.[11] 이때는 아직 천주교회에서 조상 제사를 금지하는 등 조선의 유교적인 가치관에 어긋나는 행동이 드러나지 않았을 때였고, 김범우를 제외한 인물들이 양반들이었기 때문에, 사건은 김범우가 귀양을 가는 것으로 끝났다.[11] 이후, 김범우는 고문으로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귀양지 밀양에서 숨을 거두었다.(1787년)[11]

2. 1. 3. 신해박해 (1791)

1791년에 발생한 신해박해는 윤지충권상연이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태운 사건으로 인해 발생했다.[18] 조선 왕조는 가톨릭의 가르침이 유교 기반의 사회 및 정치 질서에 위협이 된다고 인식하여 가톨릭을 박해했다. 가톨릭 신앙은 현세의 권위보다 하느님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기에, 기존의 위계질서를 뒤흔들 잠재력이 있는 전복적인 사상으로 간주되었다.

2. 1. 4. 신유박해 (1801)

1791년 신해박해에 이어 1801년에 발생한 조선 정부의 대규모 천주교 탄압 사건이다. 조선 정부는 천주교의 가르침이 유교적 사회 질서에 위협이 된다고 보았고, 천주교 신앙이 하느님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여 기존 질서를 뒤흔들 수 있다고 여겼다.

최초의 공식적인 박해 기록은 1801년 프랑스 출신 가톨릭 사제 시메옹 프랑수아 베르뇌가 체포되어 추방된 사건이다. 이후 황사영 백서 사건 등이 발생했다.

2. 2. 천주교회의 성장과 박해

조선19세기 후반 서양 국가들과의 개항으로 큰 변화를 겪으며 근대 사회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개항이 곧바로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지는 않았다. 초기에는 천주교 신앙이 유교 질서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져 심한 박해를 받았다. 1801년 프랑스 출신 가톨릭 사제가 체포 및 추방된 것이 공식적인 박해의 첫 기록이다. 이후에도 개종자 수가 늘면서 박해는 더욱 심해졌다.

하지만 개항 이후 시대 변화를 감지한 지배층은 천주교 문제를 박해로만 일관할 수 없다고 판단,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등 서양인 선교사들의 활동을 묵인했다. 1886년 조선프랑스가 맺은 《한불수호통상조약》은 천주교 신앙 자유의 시작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후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여러 차례 박해가 있었지만, 천주교회는 꾸준히 성장했다.

2. 2. 1. 천주교회의 성장

19세기 후반, 조선서양 국가들과 개항하면서 근대사회로 전환되었지만, 곧바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지는 않았다. 개항 이후 맺은 여러 조약에서도 조선인에게는 신앙의 자유가 용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 변화를 감지한 지배층은 천주교회 문제를 박해로만 일관할 수 없다고 판단,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등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들의 활동을 묵인하는 입장을 취했다.

1886년 조선 정부와 프랑스가 맺은 《한불수호통상조약》을 통해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기 시작했다는 견해가 있다. 프랑스는 조약문에 신앙 자유 허용 항목을 넣으려 했으나, 조선의 반대로 프랑스 사람이 조선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는 조문을 삽입했다. 천주교회 측은 이를 ‘전교의 자유’에 대한 인정으로 확대 해석했고, 조선 조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블랑 주교를 비롯한 조선 천주교회와 프랑스 측은 이 구절이 전교의 자유에 대한 인정이라고 주장하여 받아들여졌다.

1882년 천주교회가 인현서당(仁峴書堂, 韓漢學校)을 설립하고, 서울과 경상도에 고아원을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신앙의 자유가 묵시적으로 용인되었다. 1885년 10월 28일에는 강원도 원주 부엉골에 신학교를 재건하여 조선인 성직자 양성에 재착수했다(최초의 신학교는 1855년 충청북도 제천 배론에 세워진 성요셉 신학교).[22]

1895년 조선 조정은 병인박해 때 순교한 일부 신도들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는데, 이는 신앙의 자유를 공인하기 위한 사전 조처로 해석되었다. 같은 해 천주교 조선교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8대 교구장 뮈텔 주교는 고종을 만나 병인박해에 대한 유감 표명과 친선 제의를 받았다. 이는 신앙의 자유를 공인했음을 뜻했고, 뮈텔 주교도 조선에서 천주교회 박해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고 기록했다.

1899년 조인된 「교민조약」(敎民條約)을 통해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에게도 신앙의 자유가 성문법으로 보장되었고, 1904년 체결된 「선교조약」(宣敎條約)을 통해 선교사들은 개항장 이외 지역에서도 토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세울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았다.[23]

2. 2. 2. 기해박해 (1839)

1839년 기해박해앵베르 주교 등 프랑스 선교사들과 많은 신자들이 처형된 사건이다.[22]

2. 2. 3. 병오박해 (1846)

19세기 후반 조선서양 국가들과의 개항으로 큰 변화를 겪었으나, 개항이 곧바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지는 않았다. 개항 이후 맺은 여러 조약에도 신앙의 자유에 대한 명백한 규정은 없었고, 외국인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되었다. 그러나 시대 변화를 감지한 지배층은 천주교 문제를 박해로만 일관할 수 없다고 판단, 신앙 실천을 묵인하는 입장을 취했다.

1882년 천주교는 인현서당(仁峴書堂, 한한학교)을 설립하여 신자가 아닌 일반 학생도 받았고, 서울과 경상도에 고아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1885년 10월 28일에는 강원도 원주 부엉골에 신학교를 재건하여 조선인 성직자 양성에 다시 착수했다.[22] 이는 신앙의 자유에 대한 조정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2. 2. 4. 병인박해 (1866)

1895년 조선 조정은 병인박해 때 순교한 일부 신도들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다. 사면 대상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이 사면령은 신앙의 자유를 공인하기 위한 사전 조처로 해석되었다.[22] 천주교 조선교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8대 교구장 뮈텔 주교는 고종을 만났는데, 이때 고종은 1866년 병인박해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며 뮈텔 주교에게 친선을 제의했다. 고종이 천주교를 인정하고, 종전의 박해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는 사실은 신앙의 자유를 공인했음을 뜻했으며, 뮈텔 주교 자신도 그날의 일기에서 조선에서 천주교회 박해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고 기록했다.[23]

한국 가톨릭교회가 한국에 처음 전래된 이후 수십 년 동안, 가톨릭 교회는 조선 왕조 치하에서 심한 박해를 받았다. 가톨릭 신앙은 현세의 권위보다 하느님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기에, 기존의 위계 질서를 뒤흔들 잠재력이 있는 전복적인 사상으로 간주되었다.

가톨릭 신자에 대한 최초의 공식 박해 기록은 18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프랑스 출신 가톨릭 사제 시메온-프랑수아 베르뇌가 체포되어 추방되었다. 수년에 걸쳐 개종자 수는 증가했고, 박해의 강도도 심해졌다.

1866년의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 확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외국 세력의 개입에 대한 우려가 이 박해를 촉발했는데, 천주교가 서방 국가, 특히 프랑스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병인박해는 광범위한 폭력과 천주교 공동체에 대한 잔혹한 탄압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기간 동안 수천 명의 한국 천주교 신자들이 살해되었는데, 여기에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모두 포함되었다. 박해 속에서 순교한 주목할 만한 인물로는 프랑스인 시메온-프랑수아 베르뇌 주교와 한국인 평신도 지도자 윤지충 바오로가 있었다.

2. 3. 개항과 신앙의 자유

간도 지역에서는 용정촌을 중심으로 한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간도 민족해방운동의 근거지 역할을 하였다. 3·1 운동을 간도 지역에서 처음으로 궐기한 곳도 용정촌이었다. 천주교 신자들이 주축이 된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민단(義民團)도 간도에서 조직되었다. 1915년 조선총독부 국경지방시찰부명서에서는 간도 천주교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1]

2. 3. 1. 신앙의 자유 묵인

간도 지역에서는 용정촌을 중심으로 한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간도 민족해방운동의 근거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반도에서 광범하게 전개된 3·1 운동을 간도 지역에서 처음으로 궐기한 곳도 용정촌이었다. 천주교 신자들이 주축이 된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민단(義民團)도 간도에서 조직되었다. 의민단의 단장은 방우룡, 부단장은 김연이었다. 의민단의 재정은 신자들의 헌금으로 충당되었다. 의민단은 1920년 간도국민회에 통합된다.[1]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교세 확장은 또 한 번 타격을 입게 되었다. 전쟁으로 프랑스 신부 11명이 소집당해 본국으로 돌아갔고 이에 따라 공석이 된 본당을 우선 이웃 본당 신부가 겸임하는 임시변통의 방법을 썼다. 그러나 워낙 지역이 넓은데다 사제의 수가 부족해 원활한 전교사업은 기대하기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2]

2. 3. 2. 한불수호통상조약 (1886)

간도 지역에서는 용정촌을 중심으로 한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간도 민족해방운동의 근거지 역할을 하였다. 3·1 운동을 간도 지역에서 처음으로 궐기한 곳도 용정촌이었다. 천주교 신자들이 주축이 된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민단(義民團)도 간도에서 조직되었다. 의민단의 단장은 방우룡, 부단장은 김연이었으며, 재정은 신자들의 헌금으로 충당되었다. 의민단은 1920년 간도국민회에 통합된다. 1915년 조선총독부 국경지방시찰부명서에서는 간도 천주교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불교 측에서는 천주교를 맹렬히 비판했다. 불교도들은 "유럽은 지금 도살장이 되었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또 어느 민족보다도 그곳 사람들은 고난을 겪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서로 싸우는 민족들의 종교가 과연 좋을 수 있으며 우리에게 행복을 줄 수 있을 것인가?"라고 비방했다.

개신교 측에서도 개신교 신자가 많은 영국과 미국이 일본 제국과 동맹을 맺은 것을 두고 자랑하는가 하면 "천주교의 성직자는 왜 독신인가?" "왜 마리아를 공경하는가?"라는 등의 상투적인 비판을 되풀이했다. 이는 개신교 선교사들이 기독교 근본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학에서 배타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은 천주교에 대해 마리아 숭배를 하는 우상종교라고 보아서 배척했다.

산업 발전과 생활비 상승, 부녀자의 공장 진출 등 유물적 생활관은 교인들의 신앙 활동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유물적 교육 및 생활관과 싸우기 위해서는 청년회 조직과 학교 교육 등이 긴급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많지 않은 교회 학교도 조선 총독부의 간섭으로 종교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해 간접적인 전교라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데 그쳤다.

2. 3. 3. 신앙의 자유 용인과 사면령

1920년 서울교구에서 원산교구가 분리, 독립되어 간도 지방까지 관할하였다. 이어 1922년에는 원산교구에서 만주 연길교구를 분리하였다. 한편 서울교구장 뮈텔 주교는 이 무렵 1839년과 1846년의 천주교 박해 때 처형당한 순교자 79명의 시복 운동을 전개했고, 1925년 7월 바티칸에서 이들의 시복식이 거행되었다.[1]

2. 4.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한국 천주교회는 항일 투쟁과 침묵이라는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은 한국 천주교회의 항일 투쟁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항일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의민단이 조직되었다.[2]

반면, 뮈텔 주교를 비롯한 교회 지도부는 일제의 식민 정책에 대해 침묵했고,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는다.[29] 그러나 교회 지도부의 입장과 달리, 많은 평신도들은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반론도 있다.[29]

1920년 원산교구가 분리되었고, 1922년에는 연길교구가 분리되었다. 1925년에는 순교자 79명의 시복식이 거행되었다.

2. 4. 1. 항일투쟁

안중근대한제국 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천주교 신자였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렸다.[1] 이 사건은 한국 천주교회의 항일 투쟁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항일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의민단이 조직되었다.[2] 의민단은 천주교 신앙을 바탕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2. 4. 2. 일제에 대한 침묵과 반론

일제강점기 당시 뮈텔 주교를 비롯한 교회 지도부는 일제의 식민 정책에 대해 침묵했고,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는다.[29] 이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고 교회 조직을 보호하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하지만, 교회 지도부의 입장과 달리, 많은 평신도들은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반론도 있다.[29]

2. 4. 3. 의민단

간도 지역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이다.

2. 4. 4. 전쟁과 이웃 종교들의 악선전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한국 천주교회의 선교 활동에 타격을 주었다. 또한, 불교개신교 측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악선전을 벌이기도 했다.[1]

2. 4. 5. 만주 간도 지방의 원산교구 편입과 시복 운동

1920년 원산교구가 분리되었고, 1922년에는 연길교구가 분리되었다. 1925년에는 순교자 79명의 시복식이 거행되었다.

2. 5. 대한민국

2014년 8월 14일, 교황 프란치스코는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한국 천주교 주교단과의 만남에서 한국 천주교회가 빈곤층을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 측이 배포한 교황 연설의 한국어 번역본에는 이 내용이 누락되어 있었다. 이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 교황청 홈페이지에 실린 영어판을 확인하면서 밝혀졌다.[31]

주교회의는 이에 대해 "일부러 빠뜨린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으나, 교황의 발언이 역사에 남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해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32] 이후 주교회의는 번역 및 감수 시간 문제로 교황청 사이트와 동시에 올릴 수 없었음을 해명하며, 최종본에는 해당 내용을 추가하였다고 밝혔다.[33][34] 그러나 9월 2일 공개된 연설 전 원고에는 해당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다.[35]

2. 5. 1. 반공주의와 대한천주교연맹

한국 전쟁한국어 전후로 한국 천주교회는 반공주의적 경향이 강했으며, 대한천주교연맹을 결성하여 반공 활동을 전개했다.

2. 5. 2. 민주화 운동 참여

2014년 8월 14일 교황 프란치스코는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한국 천주교 주교단을 만난 자리에서, "어떤 교회와 공동체들은 그 자체가 중산층이 돼 공동체의 일부인 가난한 사람들이 심지어 수치감을 느낄 정도입니다."라고 하며 빈곤층을 외면하는 교회를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하지만 그 날 한국 천주교 측이 배포한 교황 연설 한국어 번역본에는 이 내용이 빠져 있었다. 이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 교황청 홈페이지에 실린 영어판을 확인하면서 밝혀졌다.[31]

주교회의 관계자는 "일부러 빠뜨린 것은 아니다" 고 해명했다. 그리고 "(처음 교황청에서 보내준 교황 연설문과는) 교황님께서 연설을 직접 하시는 자리에서 약간 달리 하셨다" 며, "바티칸 측에서도 영구적인 기록을 위해 실제 하신 말씀과 맞추고자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실제로 교황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가 중요하므로 그에 따라 번역문을 교체할 계획을 갖고 있다" 고 덧붙였다.[31] 하지만 교황의 발언이 역사에 남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해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왔다.[32]

이후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교황청 사이트에는 교황께서 연설과 강론을 한 직후 이 메시지가 게시됩니다. 이 사이트에 올라가는 내용은 즉석에서 추가한 말씀까지 올라가게 되므로, [http://popekorea.catholic.or.kr/ 방한준비위원회]에 보내온 사전 원고와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일부 언론에서 보도하는 것처럼 교황의 말씀을 일부러 누락하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번역과 감수 등에 걸리는 시간이 있어 교황청 사이트와 동시에 올릴 수 없고 약간의 시간이 필요함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밝혔다.[33] 그리고 최종본에는 이 내용을 추가했으며,[34] 9월 2일에 공개된 연설 전 원고에는 해당 내용이 빠져 있었다.[35]

2. 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은 공식적으로 무신론 국가이며[1][2], 교황청과는 외교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한국 전쟁 이후 수십 년 동안 북한에서 가톨릭교 활동은 중단되었으며, 현재 북한 내에 활동 중인 가톨릭 교회는 없다.

북한 원산시 근처에는 유럽 외 유일한 자유 수도원이자, 전 세계 11개 남은 자유 수도원 중 하나인 덕원 자치 수도원이 있으나, 1949년부터 시작된 북한의 기독교인 박해[3]로 인해 수도원에서의 모든 활동은 불가능해졌다.[4]

2. 6. 1. 북한의 천주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가톨릭교회를 참고하십시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공식적으로 무신론 국가이며[1][2], 교황청과는 외교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한국 전쟁 이후 수십 년 동안 가톨릭교는 북한에서 활동이 중단되었으며, 현재 북한에는 활동 중인 가톨릭 교회가 없다.

유럽 외 유일한 자유 수도원이자, 남은 11개의 자유 수도원 중 하나인 덕원 자치 수도원은 북한 원산시 근처에 있다. 1949년부터 시작된 북한의 기독교인 박해[3]로 인해 수도원에서의 모든 활동이 불가능해졌다.[4] 하지만 덕원 자치 수도원은 가톨릭 교회 내에서 몇 안 되는 남아있는 자유 수도원 중 하나로 공식적으로 유지되고 있다.[5]

2. 6. 2. 대한민국 교회와 관계

대한민국 교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선교를 위해 노력하고,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북한 신자들과의 교류가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다.[1][2] 북한은 공식적으로 무신론 국가이며, 교황청과는 외교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한국 전쟁 이후 북한에는 가톨릭 교계 제도가 수십 년 동안 활동이 중단되었으며, 현재 북한 내에 활동 중인 가톨릭 교회는 없다.

북한 원산시 근처에는 유럽 외 유일한 자유 수도원이자, 전 세계 11개 남은 자유 수도원 중 하나인 덕원 자치 수도원이 있다. 그러나 1949년부터 시작된 북한의 기독교인 박해[3]로 인해 수도원에서의 모든 활동은 불가능해졌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원 자치 수도원은 가톨릭 교회 내에서 공식적으로 유지되고 있다.[5]

2. 7. 연표

3. 교세

2017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에는 약 1,734개의 본당과 5,360명의 사제가 있다.[6] 대한민국 인구 중 약 11%(약 580만 명)가 가톨릭 신자이며,[6] 필리핀, 동티모르 다음으로 아시아에서 가톨릭 교세가 강한 국가 중 하나이다.

참조

[1] 서적 World and Its Peoples: Eastern and Southern Asia https://books.google[...] Marshall Cavendish 2007-09
[2] 서적 The State of Religion Atlas https://archive.org/[...] Simon & Schuster
[3] 웹사이트 North Korean Martyrs, the first process for beatification gets underway http://www.asianews.[...] 2012-01-19
[4] 웹사이트 Diocesan Directory: Territorial Abbacy of Tokwon http://www.ucanews.c[...] 2012-01-19
[5] 웹사이트 Catholic Dioceses in the World by Type: Territorial Abbacies http://www.gcatholic[...] 2012-01-19
[6] 웹사이트 Catholic Church in Korea Statistics 2017 http://www.cbck.or.k[...] 2018-04-13
[7] 문서 이덕일 선생의 컬럼 '[http://h21.hani.co.kr/section-021147000/2008/02/021147000200802140697036.html 풍양 조씨의 박해에서 천주교를 지킨 정하상
[8] 문서 이 시기에 세례를 받은 조선인으로 [[빈센트 권]]이 알려져 있다.
[9] 서적 한국사 이야기 15:문화군주 정조의 나라 만들기 한길사
[10] 문서 사제를 대신해 [[세례]]를 주는 것.
[11] 웹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추조적발사건 [秋曹摘發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terms.naver.[...]
[12] 웹사이트 순조실록 (1838) 1권, 순조 즉위년 7월 4일 갑신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13] 웹사이트 순조실록 (1838) 2권, 순조 1년 1월 10일 정해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14] 웹사이트 순조실록 (1838) 3권, 순조 1년 10월 5일 무신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15] 뉴스 한겨레 21 2008년 2월 14일자, 이덕일의 시대에 도전한 사람들_풍양 조씨의 박해에서 천주교를 지킨 정하상 http://h21.hani.co.k[...] 2008-02-14
[16] 저널 역사탐방 : 민족혼의 제단에 바친 밀알 - 김대건과 민영환 - http://kiss.kstudy.c[...] 대한지방행정공제회 2016-02-13
[17] 웹인용 "[전례] 네 형제를 어떻게 하였느냐?" http://pds.catholic.[...] 2018-09-09
[18] 문서 옥사 1명, 사형 118명 네이버 백과사전 '기해박해' 설명 http://100.naver.com[...]
[19] 서적 《최근사에 비친 한국의 실체》 국학자료원
[20] 웹인용 병인박해(丙寅迫害)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1] 뉴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08년 8월 24일자, 흥선대원군과 천주교 http://www.nahnews.n[...] 2008-08-24
[22] 웹인용 서울대교구 대신학교 웹사이트 http://songsin.catho[...]
[23] 뉴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08년 11월 29일자, 조선 말, 가톨릭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http://www.nahnews.n[...] 2008-11-29
[24] 웹사이트 https://www.chosun.c[...]
[25] 서적 뮈텔주교일기 4 한국교회사연구소
[26] 서적 드망즈 주교 일기
[27] 서적 서울교구연보 2
[28] 웹인용 한국기독교장로회 천안살림교회 최형묵 목사 신학칼럼 http://www.salrim.ne[...] 2014-10-10
[29] 웹인용 한국교회의 역사 http://www.cbck.or.k[...]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2-04-28
[30] 웹인용 해설/함흥교구장·덕원자치수도원구 자치구장 서리 임명 http://www.catholict[...] 2008-01-21
[31] 뉴스 주교단에 한 교황 연설, 한 문단 통째로 빠져 http://www.catholicn[...]
[32] 뉴스 한국 천주교회, 교황의 '부자 교회' 비판은 쏙 빼놓고… http://news.jtbc.joi[...] JTBC 뉴스 2014-08-20
[33] 웹사이트 프란치스코 교황 메시지의 수정 배포 과정에 대한 안내 http://www.cbck.or.k[...]
[34] 웹사이트 4박 5일간의 교황 메시지 모음 http://www.cbck.or.k[...]
[35] 웹사이트 참고 프란치스코 교황, '한국 주교단에게 하신 연설' 연설 전 원고(2014.8.14.) http://blog.naver.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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